Phir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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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가득히
[2.0] 재즈 싱어(1927)
2023.03.10

 

재즈 싱어
The Jazz Singer
1927

시대성과 감상

시대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들을 볼 때면 그런 기분이 든다. "내가 만약에 저 시대에 태어나서 저 작품을 봤다면, 감상이 지금과는 달랐을까?"

2019년에 보았던 '매트릭스(1999)'가 그러했고 2022년에 본 '사랑은 비를 타고(1957)'이 그러했으며 2023년에 본 '오즈의 마법사(1939)'가 그랬다. 사실 꼽자면 더 많다만 당장 생각나는/영화사의 족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작품이 저 셋이라 일단 열거했다. 2022년 아바타 2 -물의 길-이 개봉한 현재 1999년의 매트릭스가 보여주는 CG는 더이상 새롭지 않으며, 유성영화 시대에서 자라온 내게 사랑은 비를 타고가 알려주는 무성영화 스타들의 과도기는 낯설기만 하고, 모든 극장에서의 기억을 컬러 영화와 함께한 내게 오즈의 마법사가 선보인 '문을 여는 순간 컬러로 바뀌는 이펙트'는 충격적이지 않다. 그냥 이전 세대들이 겪었던 것을 기록으로만 조금 알 뿐이다. 매트릭스의 CG를 최첨단이라고 감탄하고,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스러져간 무성영화 스타들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컬러영화가 예산 등으로 대중화되지 않았을 때 오즈의 마법사의 컬러 전환 이펙트를 보고 혁신이라고 느꼈다는 것을.

그래서, 그 시대에만, 현역으로 봤을 때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감동과 감상이라는 걸 소중히 해야겠다고 느낀다. 조금이나마 '영화나 드라마나 만화 보고 감상을 남기자!' 고 마음먹은 것은 아마 이걸 깨달았을 때부터다.

 

영화 '재즈 싱어' 자체는 재미있지 않았다. 보는 것이 너무 버거웠다. 왜냐하면 나는 2023년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재즈 싱어는 최초의 유성 영화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무성영화에 극소수 대사만 배우의 육성으로 나오는 수준이다. 영화 위에 음악을 덧씌우는 건 원래도 그랬다. 재즈 싱어는 소리로 말을 한다, 즉 'Talkie Movie'의 선구자로, '사랑은 비를 타고(1957)'와 '바빌론(2022)'에서 그 파급력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는 배경설명은 집어치우고, 난 무성 영화가 어렵다. 목소리가 안 들리고 대사는 씬 중간중간에 잠깐 나오는 자막으로 처리되니까 잠깐 물을 마시러 다녀오는 동안 전개되는 이야기를 짐작도 할 수 없다. 집중력이 없고 생각이 금방 휘발돼서 감상을 쓰려면 실시간으로 노트나 트위터에 적어야 하는 내게는 고역 중의 고역이다. 무성 영화 특유의 과장된 연기 역시 그렇다. 당시에는 억양으로 연기하는 게 불가능했으므로 표정과 몸짓만이 유이한 수단이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란 걸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나도 아는데...!

'내용이 뻔하고 전개가 알 만하다'는 단점도 있었으나, 이게 거의 100년이 다 되어가는 영화란 걸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은 아니지 싶다.

2023년을 살아가는 인간이 1927년의 감수성을 가질 순 없는 법이다. 나는 알 존슨이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악성곱슬 머리 가발을 쓰는 장면에서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이젠 더 이상 못 보겠다고.

 

검은 피부와 두꺼운 입술, 악성곱슬 가발. 사실 난 이 영화에 대해 많이 듣긴 했지만 블랙페이스 분장이 나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다. 아예 포스터가 저렇더라.

사실 1900년대 초반의 세태를 생각해보면 재즈 싱어에서 블랙페이스 분장을 한 것은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다. 재즈는 미국의 흑인들이 일궈온 문화인데, 백인들은 흑인 아티스트를 탐탁치 않아했으니까. 흑인들이 백인과 같은 음식점이나 화장실에 출입하지 못하고, 교회에서는 구석의 지정된 자리에만 앉을 수 있게 한 짐 크로우 법은 1950년에나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두드려 맞고 1960년대에서야 사라졌다. 그나저나 블랙페이스 분장을 대놓고 영화 포스터로 설정하다니, 왓챠도 참 얄궂다. 

 

재즈 싱어의 등장으로 유성 영화 시대의 과도기를 다룬 영화 '바빌론(2022)'에 나오는 대사가 있다(VOD로 체크 안 해서 정확한 내용은 아님). "당신이 죽어도 먼 훗날 당신의 영화를 보는 관객에겐 천사와 영혼처럼 불멸일 것이다." 주연 배우 알 존슨이 말하는 순간은 영원히 반복되고, 요절한 앨런 크로슬랜드의 수많은 감독작 중 단 하나의 영화는 영화 사상 가장 길이 화자될 것이니까. 게다가 이 영화로 제1회 아카데미 공로상을 수상한,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사 중 하나인 워너 브라더스의 인트로는 아예 '재즈 싱어'의 촬영 스튜디오가 아닌가? 1시간 30분 중 정확한 대사는 합해봤자 수 분 남짓. 그 수 분이 역사로 박제되어 영원히 남는다. 천사와 영혼처럼.

뭐... 알 졸슨의 블랙페이스 분장도 영원히 남아 인종차별의 사료로 쓰일 것이다... 시대상을 담는 영화란 아름답구나.

 

 

ⓒ yunic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