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우 (2016)
Grave
Raw
아지님 뇸님과 넷플파...
본성을 숨기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회적 억압과 자아탐구, 동족에 대한 갈구, 사회적 피식자와 포식자의 역할반전. 뭐이런거에대한얘기라서....너무좋앗름
진짜너무좃았는데ㅜ어디가서 추천은 못하긌다
날것의 본성
이렇게까지 보고 나서 '이래도 되나?', '이걸 좋다고 느껴도 되나?' 싶은 영화는, 아예 없던 건 아니었지만, 하여튼 영화의 파격적인 수위와 소재 때문에.... 처음이라고 느꼈다. 심지어 최근에 들었던 강의가 생각나서 더더욱.
참고로 '질리언 로즈'라는 학자의 '페미니즘과 지리학'이라는 책 속 '경관 읽기: 권력의 불안정한 쾌락' 챕터에 관련한 강의였으니 여력이 되시는 분들은 한번 읽어주셨으면.
여성은 유구하게 피식자의 위치에 섰다. 대지모신(Mother Nature)라는 단어는 여성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구한 여성혐오적 프레임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인간은 항상 자연을 착취해왔다. 땅을 차지하겠다며 전쟁을 벌이고 소송을 건다. 땅에서 나온 작물을 기른다. 언제나 자연은 소유와 정복, 착취의 대상이었고, 그런 이미지는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적합하다. 이것이 자연이 여성의 모습을 한 이유다. 이 '착취'의 프레임은 다른 대상에게도 적용된다. '먹잇감'이다. 우리가 흔히 '따먹는다' 라는 표현에서 연상 가능한 게 무엇이 있는가?
과실을 따먹는 주체는 인류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의미에서 '따먹는다'의 주체는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인간종을 의미하는 man을 human으로 대체하자는 의견이 힘을 입기 전까지, 인류(mankind)는 남성(man)과 동의어였다. 인류라는 단어가 성별을 포괄하는 단어(humankind)가 된 것은 생각보다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다. 인류는 자연을 포식하는 존재였고, 여성은 자연의 범주에 든다. 그리고 섭취하는 행위는 착취의 정점에 선 행위이기도 하다.
쥐스탱은 강경한 채식주의자 가문에서 자랐다. 우리 사회는 지난 날 동안 채식주의를 건강과 미용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컸다. 동물권과 관련된 논의가 이루어진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좋지 않은 환경에서 학대당하며 사육되는 동물들과, 축산업의 폐해로 인한 자연 파괴가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 비건들의 대표적인 주장이다. 쥐스탱의 가문이 고기 하나 씹지 못하게 하던 강경한 채식주의자 집안이었던 것은 이 집안의 내력을 보여주기 위한 떡밥이지만, 자연=여성=피식자라는 시스템을 보여주는 게 아니었을까.
'사람 피 맛을 본 동물은 위험해.' 라며 언니의 손가락을 먹은 강아지를 안락사시키는 것은 인간 중심적인 시선에선 당연한 것이다. 또 뭘 먹을 줄 알고?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가축은 여성의 비유이다. 인류man에서 제외된 존재nature는 인류에게 해를 입히면 안 된다. 인류의 시선에서 거슬린다면 즉결처분을 당한다.... 마치 '남성의 특권과 위치를 위협하는 여성은 사회에서 처분해야 한다'라고도 읽히지 않는가? 실제로 지난날 수없이 많은 여성들이 당해왔던 것이다. 그 옛날 과격하게는 '마녀', 우리에게 익숙하게는 '독종'이나 '드센 년' 따위의 멸칭과 함께.
하여튼 이 영화는 포식하는 주체를 쥐스탱으로 묘사한다. 남성의 것으로 받아들여진 특성을 아직 스스로의 자아를 탐구할 혼란한 시기의 여성에게 부여한다. 이 자체만으로도 페미니즘적인 의미가 크다.
그것이 가장 잘 나타나지 않았나? 싶은 장면은 역시 운동하는 아드리앙과 그를 보는 쥐스탱의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 아드리앙을 향한 카메라워크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았는가? 기존 매체들에서 '핀 업 걸' 따위로 여성을 묘사하던 방식들이 스쳐지나갔다. 쓸데 없는 노출이나 위에서 아래로 훑는 듯한, 욕망이 그득한 시선. 이는 사냥감을 추적하는 사냥꾼의 모습이다. 사냥이란 행위는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우월감과 욕망의 발현이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남성에게 있어 여성도 다르지 않았다.
동시에, 쥐스탱은 평생 채식주의자 가문에서 고기 한 점 씹지 않도록 교육받지 않았는가? 쥐스탱의 육식은 유구한 본성으로 묘사된다. 본성을 억압하는 구속구의 역할이었으나 이를 감시할 부모가 없는 삶을 처음으로 접하고, 비로소 자신의 욕망을 찾지만 계속해서 눈을 돌리고자 한다. 알레르기 반응처럼 붉게 부어오르고 벗겨지는 피부가 그렇다. 욕망을 직시하기 어려워서, 본인에게 욕망이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없어서 나타나는 거부반응이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교육받아 스스로의 욕망을 인정하지 못하고 굴절해서 표현하는 것 역시 여성의 특성이다. 여성은 헤픈 년이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한다.
거울을 보며 춤을 출 때 나오는 노래의 수위는 심상치 않다. 섹스나 오랄이나 69 따위의 키워드가 반복해서 나온다. 왜 굳이 이 노래, 'Plus putes que toutes les putes'를 들으면서 춤을 췄을까? 남성과 여성, 인류와 자연, 포식과 피식의 관계는표면적으로는 식욕의 문제로 보인다. 브라질리언 왁싱을 하던 쥐스탱의 음부 주변에 주둥이를 들이대던 강아지나, 초반부에 나온 수의대생의 '수간'에 대한 대화는 이를 위한 장면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따먹는다' 라는 단어에서 유추할 수 있듯, 식욕과 색욕은 획 두 개 차이이고, 아주 자주 등치된다. 남성의 색욕은 곧 여성의 식욕과 마찬가지라 참을 수 없는 본능이란 우스개도 있듯이(이 유머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드리앙은 동성애자(라는 지속적인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쥐스탱과 섹스하고, 쥐스탱은 아드리앙을 뜯어먹는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이해되지 않는 감정선이 많았지만, 마지막 엔딩을 보고 그런 의문점은 대부분 해소됐다.
아버지는 뜯어먹힌 듯한 본인의 가슴팍을 쥐스탱에게 보이며 이 집안의 내력임을 알린다. 엄마와 딸, 모계로 이어지는 특성이라는 것도 흥미롭지만.
갑자기 차도로 뛰어들어 운전하던 사람을 죽이고는 '너 보라고 이러는 거야.' 하며 쥐스탱 앞에서 운전수의 머리를 뜯어먹던 쥐스탱의 언니, 취한 쥐스탱을 구경거리로 삼는 언니, 그렇게 싸움을 거는 쥐스탱의 얼굴과 손을 물어뜯는 언니. 손가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받아먹다가 충동적으로 절단면을 입에 넣고 손가락 살을 뜯어먹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언니.
처음에는 쥐스탱이 본인의 손가락을 먹었다는 데에서 오는 혐오나 공포로 생각했었다. 엔딩을 본 이후에는, '세상에 본인이 혼자가 아니라는 데에서 오는 안도감', '환희', '동질감'이 섞인 눈물이 아니었을까.
보통 로맨스의 구도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정상성 범주 내에 존재하는)다름에서 시작되는 끌림인 경우가 많다. 이 경우 동질성은 동족혐오로 소비된다. 이게 보편적이다. 박찬욱 감독의 수많은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동족에 대한 갈구'라는 키워드는 박찬욱 영화를 퀴어 코드로 해석할 여지를 준다. 그러니까 "서래 씨가 나하고 같은 종족이란 거, 진작에 알았어요." 같은 대사. 대부분의 퀴어 커뮤니티가 동족을 찾고자 하는 욕망에서 시작된다. 괜히 퀴어들의 대표적인 단어가 '연대'인 게 아니다.
그러니까 영화를 끝까지 본 이후에야 저 장면은 이렇게 읽힌다.
'나도 너와 같은 동족이다'라며 동생 앞에서 자기증명을 하는 언니, 쥐스탱이 동족이라는 증거를 남기고 싶은 언니, 우리는 같은 존재인데 왜 싸우느냐며 또다시 동생을 향해 자기증명을 하는 언니, 식인에 각성한 동생을 향해 동족을 찾았다는 환희의 눈물을 흘리는 언니.
언니에게 묻은 피를 씻겨 주는 동생과, 동생을 대신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간 언니. 이 연대의 이야기를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