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rr
55%
태양은 가득히
2023 삘룡영화상_2
December 30

삘룡영화상 2편 (3~6위)

하루에 하나씩 쓰면 딱 신년 전에 완성임 ㄷㄷ 쩔죠?

허락 안 받고 박제함

 

 

 

 

6. 로우 Raw (2016)

정말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고어 영화는 오락영화가 아니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지만 로우는 예술입니다 예술. 그러나 진짜로 어디 가서 추천은 못 하겠단 점이... 이 감독의 '티탄' 역시 정말 감명깊게 봤는데요, 이상하고 자극적인 화면으로 비위를 한껏 상하게 하면서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너무 강렬하게 뇌리에 남는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뇌가 상할까 봐 두 번은 못 보겠는 영화 전문점이랄까요. 고어하기만 한 게 아니라 작중에는 오랄이나 69나 섹스 따위의 키워드가 꽤 나오는 편입니다.

처음 영화를 다 보고 '이...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이... 이래도 되나?' 에는 '이런 수위여도 괜찮은가?', '이렇게 자극적인 걸 봐도 괜찮은가?' 를 넘어서 '내가 이걸 좋다고 느껴도 괜찮은가?' 라는 느낌?

저는 이 영화를 '스스로에 대해 혼란스러울 시기 헤메는 사람의 자아탐구, 사회적으로 억압당하는 본성, 피식자와 포식자의 역할 반전, 동족에 대한 갈구, 소수자가 커뮤니티에 인정받기 위한 자기증명' 정도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특히 '동족에 대한 갈구' 이런 키워드는 제가 정말 환장해 마지않는 소재인데요, 그건 아마도 제가 상대적으로 비가시화되어 인지도가 떨어지고 관련 담론 형성이 어려운 퀴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영화를 보겠다고 마음먹은 시점, 이 영화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을 때 질리언 로즈의 '페미니즘과 지리학'에 대해 잠깐 강의를 듣고 갔었는데요, 어쩌면 그 강의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영화의 주제가 일맥상통했기 때문에 제 뇌리에 더 강렬하게 남아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러나저러나 해도 쥐스탱이 처음 각성하는 장면의 환희가 잊혀지지 않네요. 본 지 꽤 된 영화고 이제 국내에서 볼 수 있는 방법도 없는데 이 장면만큼은 바로 어제 본 것처럼 생생합니다.

여성은 유구하게 피식자의 위치에 섰다. 대지모신(Mother Nature)라는 단어는 여성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구한 여성혐오적 프레임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인간은 항상 자연을 착취해왔다. 땅을 차지하겠다며 전쟁을 벌이고 소송을 건다. 땅에서 나온 작물을 기른다. 언제나 자연은 소유와 정복, 착취의 대상이었고, 그런 이미지는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적합하다. 이것이 자연이 여성의 모습을 한 이유다. 이 '착취'의 프레임은 다른 대상에게도 적용된다. '먹잇감'이다. 우리가 흔히 '따먹는다' 라는 표현에서 연상 가능한 게 무엇이 있는가?

 

미장센 ★★☆
독특함 ★★★★☆
전개 방식 ★★★★

자극적 ★★★★★

 

여성영화 부문

달링스 Darlings (2022)

'로우'의 분위기가 시종일관 무겁게 느껴지고 은유로 가득해 어렵게 다가왔다면 '달링스'는 노골적이고 유쾌하고 가벼우면서도 어두웠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엄청 막 예술적으로 메시지나 화면이 좋은 영화는 아니고요, 그냥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좋아하는 영화라서 글에 넣었습니다. 왜요 제가 사심 가득한 사람으로 보여요?

가정 폭력을 당하는 아내가 남편에게 '나를 존중하는 법을 알려주겠다' 며 남편을 감금하고 복수한다는 아주 흔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복수물에서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이 영화는 엉성하고, 통쾌하지도 않고, 당장이라도 또 남편과 아내의 위치가 바뀌어버릴까봐 불안했어요. 사실 아내가 복수하는 내용보다는 아내가 학대당하는 내용이 더 길기도 했고. 아내의 복수 과정이 다소 코미디스럽게 묘사되지만 남편의 학대 장면은 여과 없이 폭력적이고 공포스럽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사회적으로 여성의 의사 표시는 앙탈이나 애교 정도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까. 누군가의 절실한 생존권 투쟁이 보는 이들에게는 애완동물이 짖는 정도의 무게감으로 다가온다는 건 정말 무섭네요.

엔딩 장면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한 영화 중 하나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맥빠진다니...' 싶은 감은 없잖아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맥빠지는 엔딩이기 때문에 더 와닿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인도 영화지만 군무 장면(맛살라 시퀀스)은 없는지라 맛살라 시퀀스를 어려워하시는 분들도 킬링타임용으로 재밌게 보실 만 코미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5. 이니셰린의 밴시 The Banshees of Inisherin (2022)

제가 매일 탐라에 봐달라고 소리치는 영화인데 아무도 안보시더라고요? 다 데스노트에 적을겁니다.

전에 트친분이 저보고 이 영화를 왜 좋아하냐고 물어보셨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조용하고 평화로우면서 어딘가 뒤틀린 그런 걸 좋아해서? 쩝... 저도 제가 왜 이 영화를 좋아하나 싶어서 닥치는 대로 해설글이나 후기글을 찾아봤는데요 아직 이렇다하게 와닿는 게 없었습니다. 왜지?! 묘하게 저랑 해석이 다르거나 묘하게 제가 포커스를 두는 부분이 아니거나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 영화 보고 저랑 이 영화 이야기 하실 분 상시 모집합니다.

아일랜드 어느 외딴 섬에 사는 나이도 성향도 다른 두 사람이 수년간 둘도 없는 절친이다가, 한 쪽이 이유도 말해주지 않은 채 갑자기 '자네와 절교하고 싶어졌어.' 라며 거리를 두고,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계속 이유를 묻고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일단은 코미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100년 전쯤 있던 아일랜드 내전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 그걸 공부하고 가야 된다고 하던데 전 그냥 봤어요. 나중에 찾아보긴 했지만 아무튼. 

감독이 연극 연출가로 유명했던 사람이기 때문인지 두 사람의 대화와 심리 위주로 이어지는 연극이라는 느낌이 강했어요. 실제로 각본은 원래 연극 각본이었다고 하네요. 게다가 위치상 바다가 자주 나오고 두 사람의 관계와 이별에 대한 이야기이다 보니 '헤어질 결심' 이 종종 생각나는 영화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술 취한 파우릭이 친절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정말로 좋아해요. 

 

미장센 ★★★☆
독특함 ★★★★
전개 방식 ★★★★

모르겠음 ★★★★★

 

 

로맨스 영화 부문 

사랑은 낙엽을 타고 Fallen Leaves (2023)

강아지 귀엽죠.

가장 최근에 본 영화입니다. 특유의 건조한 느낌이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이 감독의 전작들이 전작들인지라 '프롤레라티라 연작'이라고 불리운다던데 과연. 왜 그렇게 부르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로코 도식을 확실하게 따르는 로코는 로코인데 분위기가 시종일관 잔잔하고 버석버석한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보통 우리는 사랑이라 한다면 톡톡 튀고 시끌벅적하며 극적이고 과장된 무언가를 떠올리지만 이것이야말로 현실과 가장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내가 또 사랑을 모르는 에이엄 발언을 한 건가?

당장 먹고 살 문제에 전전긍긍하고 뉴스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전쟁이니 사건사고니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끊이질 않고 전기세는 오르고 노사갈등은 예사에 윗선에 치이고 사회생활에 치여서 닳고 무기력하고 무감정한 퇴근길 속 시니컬함 뒤의 한 스푼 유머감각이라니... 어떻게 이렇게 현실적인 영화가?

그래도 그 버석버석하고 메말라가는 상황 속에서 찾은 사랑이 아주 짜릿하고 화사한 느낌을 주거나 인생을 크게 변화시키지는 않지만 마시던 술을 줄이게 해준다든지 좀 더 집안을 꾸미게 된다든지 싸구려 인스턴트가 아니라 스스로 요리를 해 먹는다든지... 눈에 크게 띄진 않지만 아 이런 게 사랑이구나 싶은 것들이 정말 좋았습니다.

아무튼 텁텁한 영화지만 뒷맛은 꽤 깔끔해서 진짜로 마음에 드는 영화였습니다. 사랑을 한다면 다른 로코보다는 이런 영화가 아닐까 싶고 그런 사랑이길 소망하는 어쩌구... 꼭보세요 님들아.

 

바닐라 스카이 Vanilla Sky (2001)

정말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근데 설명을 하면 스포임 쥐엔장...

마지막 반전 때문에 불호평이 많던데 솔직히 저는 이 영화 뭐 이런 쓰레기같은 게... 싶고 완전 별로다가 마지막 반전 때문에 너무너무 좋아진 거거든요??

다 알못들이야.

개인적으로 영화에 계속 깔리는 오묘한 색의 보랏빛 하늘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저 죽으면 다음 생엔 고양이로 태어나려고요.

 

4. 에이아이 A.I. (2001)

솔직히 이걸 넣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올해 본 영화는 맞으니까...

하여튼 아주 오래 전에 본 기억이 있었는데, 머리가 굵어지고 다시 보니까 여전히 좋더라고요. 옛날엔 이거 가족영화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이거 가족영화라고 하는 사람들 다 순 사기꾼이야. 그러고 보니 예전엔 이 영화의 주드 로가 마냥 멋지기만 한 어른이었는데 나이 먹고 보니 이름부터 지골로잖아... 진짜 도움 안 되잖아... 싶어서 웃겼습니다.

개인적으로 2막에서 지골로랑 함께 다니며 인간이 되고자 하는 데이빗의 여정을 정말 좋아하지만, 제일 좋아하는 건 역시 3막이 아닐까 합니다. 3막이 호불호가 가장 많이 갈린다고 하는데 솔직히 저는 3막 없었으면 진짜 그저 그런 영화였을 것 같거든요?? 단 하루를 위해 살아왔고 그게 이내 흔적도 없이 스러질 허상이란 걸 알면서도 결국 소망하고야 만다는 인간의 욕심이라는 점이 정말 좋단 말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게 단순히 '프로그래밍된' 무언가라는 점이 저를 정말 힘들게 합니다. 맹목적으로 부모의 사랑을 갈구했던 데이빗이 옛날엔 불쌍하고 인간적으로만 느껴졌는데 지금 보니 그냥 '사랑받도록', '사랑받게 행동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만들어졌고 그걸 충실히 따르기 위해 행동한다는 점에서 이거 제법 괴상하지 않나...

포켓몬은 당신을 슬프지 않게 하기 위해 버텼다! 라고 출력되는 한 문장처럼, 로봇의 전자 패널에 나타나는 얼굴 표정 모양 네온사인처럼 무기체 그 자체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이런 것에 감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몹시 인간다운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데이빗을 인간처럼 여긴 게 아닌가... 그런 뭐 횡설수설

원래 스탠리 큐브릭이 기획한 영화라는데 두 감독의 성향이 성향이라 그런지 개인적으로 큐브릭은 어떻게 엔딩을 냈을지 궁금해지는 영화기도 해요.

 

미장센 ★★★☆
독특함 ★★★
전개 방식 ★★★★

감동 ★★★★★★

 

드라마 부문

 

페르시아어 수업 Persian Lessons (2020)

전쟁 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인간이 사람이 아니라 총알이나 숫자 따위로 묘사되는 것이 싫어서 그렇습니다. 그냥 묘하게 죄책감도 생기고. 드물게 제가 내돈내산한 세계대전 배경의 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얼마나 전쟁 영화를 싫어하냐면 저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랑 서부 전선 이상 없다도 안 봤어요.

여튼 구글무비 뒤적거리면서 아 볼 거 없나 하다가 포스터의 분위기와 설명문구를 보고 정말 홀린 듯이 구매한 작품이었는데, 저는 정말 대만족이었습니다.

나치군이 유대인들을 잡아와 처형하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유대인이었던 주인공은 우연히 얻은 페르시아어 서적을 들고는 본인이 페르시아인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되고 그대로 독일군 장교에게 페르시아어 과외를 시켜주게 된다는 이야기인데요, 당연히 페르시아인이란 소리는 거짓말이기 때문에 죽지 않기 위해 가짜로 페르시아어 단어를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가짜 페르시아어 단어를 만드는 방법이 정말 좋았습니다. 이게 엔딩 장면과 이어지는 것까지 완벽하게.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라고 하던가요? 두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약속을 통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스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정말 인상깊습니다.

원래 크레딧을 끝까지 보는 버릇은 없는데(특히 영화관도 아니고 집에서 보는 영화면) 이 영화는 크레딧이 다 올라가는 걸 끝까지 보고 있었네요. 그만큼 여운이 깊게 남은 것도 있지만 크레딧을 안 보면 뭔가 영화의 메시지를 부정하는 것 같은 느낌에 그만...

일단 살고 보자, 로 시작했던 주인공이 자신의 안위에 급급하다가 주위로 시야를 넓히게 되는 것도 좋았습니다.

 

 

 

ⓒ yunic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