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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가득히
[4.5] 추락의 해부
2024.02.02

추락의 해부 

Anatomy of a Fall

Anatomie D'une Chute

2023

 

지인의 강력 추천으로 국내개봉을 손꼽아 기다렸던 그 작품.

 

두 시간 반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 법정물이라는 장르. 솔직히 처지거나 질리다고 느낄 수 있을 텐데 그런 것 없이 무척 몰입해서 봤다.

'괴물'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일단 '이 사실을 믿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후로는 그냥 그렇게 보인다. 진실보다는 내가 그렇게 믿기로 한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추락의 해부' 속 검사와 매스컴은 아내가 범인이라고 믿는다. 그들에게 진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에, 그의 소설까지 증거로 취급하며 이야기한다. 산드라는 처음 용의자로 지목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 '내가 죽이지 않았다' 고 이야기하나, 변호사는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답한다. 그렇다. 이미 그렇게 믿기로 결정한 순간 그건 중요하지 않다.

 

재판이란 시비를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가리는 일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그리고 재판이란 게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지는가? 작중에서 산드라가 대니얼에게 강조하는 말이 있다. 사실이 곧 진실은 아니라고. 사실이란 전체 상황의 지극히 일부일 뿐이라고. 진실의 파편이지만 그 짧은 상황 하나만으로 모든 진실을 가늠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작중에서 검사와 증인, 변호인과 산드라는 그 '사실'에 대한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을 내세운다. 산드라와 남편의 직업이 작가인 이유, 작가 지망생인 학생과 인터뷰를 했던 이유. 그건 이 상황 자체가 창작의 연속이기 때문이 아닐까.

검사도, 변호인단도, 증인도. 내보이고 싶은 결론은 뚜렷하다. 그러나 이야기에 있는 공백을 채워 결론에 다다르는 것은 본인 재량이다. 그 개연성과 결론이 배심원단, 그러니까 독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어느 이야기를 가장 마음에 들어할까?

대니얼의 증언으로 산드라에게 부정적이던 판세는 크게 뒤집힌다. 그렇지만 마찬가지로 이 역시 진실은 아니다. 검사가 대니얼에게 일렀듯 이는 사실에 기반해 추론해냈을 뿐이다. 다만 그 추론이 가장 '그럴듯하고', '배심원단의 마음을 움직였기'에, 대니얼의 증언은 곧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작중 내내 어떤 결론을 내릴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다니엘이 결론짓기를 결심한 순간부터 이야기가 빠르게 진전된다. 두 작가 사이의 아이가 작가로 거듭나는 것이다.

보통 어떤 진실을 놓쳤을 때, 그것을 맹점blindspot이라고 하지 않는가? 진실은 시선과 관련이 있고, 보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보지 못하는' 대니얼이야말로 이 영화의 주인공이고, 열쇠가 아니었을까. 누구나 보지 못한 영역은 상상으로 메우기 마련이다. 시각 장애가 있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보지 못하는 신체와, 부모와 같이 살면서도 '정서적으로' 보지 못했던 어린아이의 시선 속에서, 어떤 결론을 지을지 결정하고 간극을 채우며 비로소 이 영화가 끝난다.

 

 

 

 

증거로 제출된 녹취록의 상황 속 남편의 잘못을 지적하는 산드라에게, '죽은 사람 재판을 하자는 건가요?' 라 묻는 검사가 인상 깊었다. 산 사람의 일생과 관계를 만인이 보는 앞에서 해부하는 것은 되건만 죽은 사람을 재판하는 것은 안 된단 말인가? 중간중간 매스컴에서는, 산드라의 책을 가지고 산드라에 대해 방송을 하지 않던가. 그들에게는 해부의 결과보다는 해부하는 과정 그 자체가 이미 오락인 듯 싶었다.

 

ⓒ yunicorn